한미 관세협상과 비관세장벽 협상을 이끌어온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15일 0시를 기해 직권면직됐다. 직권면직은 임명권자가 일방적으로 공무원 신분을 박탈하는 조치로, 정무직 인사에서는 이례적인 방식이다. 여한구는 면직 전날까지 정상적으로 출근했고 향후 일정까지 잡혀 있던 상태였다. 후임자도 지명되지 않아 산업통상자원부는 비상체계를 가동한 상태다.
사유도 후임도 없는 돌연 경질
여한구의 경질을 둘러싸고 정부는 구체적인 사유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정무직 인사는 임명권자의 권한이자 재량 영역”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았다. 하지만 이번 인사가 벌어진 시점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의 무역법 301조 조사와 쿠팡을 비롯한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대우 논란 등 민감한 통상 현안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조치가 통상 협상 성과나 업무와는 무관하며, 업무 외적인 개인적 의혹이 작용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한구 본인은 자신을 둘러싼 의혹이 사실과 다르다고 강하게 반박하며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한구는 앞서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뒤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발탁된 인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상 등 굵직한 통상 현안을 여러 차례 다뤄본 베테랑 관료로 꼽혀왔다. 그런 경력의 소유자를 협상 중대 국면에서, 그것도 구체적 사유조차 밝히지 않은 채 직권면직이라는 초강경 카드로 내친 것은 통상 관료 사회 전반에도 적잖은 충격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후임 인선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무 라인은 당분간 국장급 간부들이 업무를 대행하는 비상체제로 협상을 이어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국익 협상”을 외치던 정부의 이중적 태도
이재명 정권은 그동안 한미 통상협상에서 “국익 우선”과 “상호 이익”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왔다. 그런데 정작 협상을 실무적으로 이끌던 사령탑을 아무런 설명 없이 하루아침에 내치는 모습은, 정부가 말해온 원칙과 실제 국정 운영 사이의 간극을 그대로 드러낸다. 협상 상대국인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협상 도중 상대측 수석대표가 사유 불명으로 갑자기 교체되는 상황은 그 자체로 협상단의 신뢰도와 안정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 더구나 후임자조차 지명하지 못한 채 비상체계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인사가 충분한 사전 검토 없이 급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런 식의 불투명한 인사 관행이 반복된다면, 실무진 전체의 사기 저하는 물론 협상 상대국에게 협상력의 허점을 노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이번 경질은 앞서 청와대가 대미 투자 패키지 합의 지연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직후 벌어졌다는 점에서 시점이 더욱 공교롭다. 관세협상 실무를 책임진 당사자를 설명 없이 전격 교체하는 모습이 반복되면, 국내에서는 물론 미국 협상 상대측에서도 이재명 정권의 통상정책 컨트롤타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통상 라인의 안정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한미 관세협상은 단순한 부처 간 실무 사안이 아니라 국가 경제안보와 직결된 문제다. 자동차·반도체·농산물 등 핵심 산업의 이해관계가 걸린 협상에서 사령탑이 공백 상태로 방치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기업과 국민에게 돌아온다. 정부는 여한구 경질의 구체적 사유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후임 인선을 서둘러 협상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은 이번 사안을 단순한 인사 잡음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국회 차원의 설명 요구와 검증을 통해 정부의 통상정책 운영 방식 전반에 책임 있는 답변을 끌어내야 한다. 국익을 지키겠다는 정부라면, 그 국익을 지킬 실무진부터 흔들림 없이 지원하는 것이 순리다. 협상단이 정치적 변수에 따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인상을 상대국에게 남기는 것 자체가 국익에 반하는 일임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협상 상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이번 돌연 경질은, 이재명 정권의 국정 운영 방식이 얼마나 즉흥적이고 불투명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남을 공산이 크다. 국가의 통상 신뢰도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만 다시 쌓아 올리기까지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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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Peter Kim








